어제까지 함께였던 우리가 도대체 왜 갈라서게 되었을까?
— 한 몸을 이룬 공동체가 갈라서는 마음의 구조 —
한국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가장 흔한 방식 중 하나가 ‘분립’이 아닌 ‘분열’이었다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교회가 두 교회, 세 교회로 갈라지고, 어제까지 함께 전심을 다해 예배드리며 손을 마주잡고 뜨겁게 기도했던 교인들이 일순간 서로의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은 사이가 된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분열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늘 ‘신앙의 언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진리를 타협할 수 없어서’라는 말이 분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명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그 거룩한 언어들 뒤에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교회는 왜 이토록 쉽게, 그리고 격렬하게 갈라지는 걸까?
분열은 두 사람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로 시작되지 않는다.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 차이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갈등’을 넘어 ‘분열’로 이어지려면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심리적 사건과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을 통째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 버리는 마음의 작동 방식’이다.
1.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갈리는 순간
수년간 동역해 온 두 장로가 있었다. 함께 새벽예배를 드리고, 교회 건축도 함께 감당했으며, 서로의 자녀 결혼식에 주례까지 부탁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해 임원 선출 과정에서 의견이 갈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견해차이라 여겼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A장로는 B장로에 대해 “저 사람은 처음부터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동안 보였던 모든 헌신이 알고보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아주 치밀한 계산이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수십 년의 동역과 신뢰가 단 몇 달 사이에 ‘속았다’는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B장로 역시 A장로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며 그와 비슷하게 A장로에 대해 교회 안팎에서 비방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장로는 서로에게 ‘완전히 나쁜 사람’이 되었고, 결국 교회는 두 진영으로 갈라졌다. 교회에서 소위 권력을 갖고 있던 두 장로 사이에서 목회자는 중재를 해보려 애썼지만, 오히려 “목사님은 누구의 말이 더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라는 말을 듣고 큰 난감함과 좌절을 느꼈다.
이는 ‘분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의 대상을 ‘좋은 부분’과 ‘나쁜 부분’이 공존하는 통합적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전적으로 좋거나 전적으로 나쁜’ 양극단의 대상으로 갈라내려는 원초적 경향이 있다. 이는 본래 갓난아기가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유래한다. 그 아기에게 어머니는 자신을 먹이고 안아주며 따뜻하게 품어주는 ‘전적으로 좋은 어머니’이거나, 자신의 필요를 즉각 채워주지 않아 좌절을 안기는 ‘전적으로 나쁜 어머니’다. 같은 한 사람이지만 아기의 마음속에서는 두 명의 다른 어머니로 경험된다. 성숙 과정을 거치며 우리는 점차 ‘자신을 만족시켜 주는 어머니와 자신을 좌절시키는 어머니가 사실은 동일 인물이며, 한 사람 안에 좋은 면과 부족한 면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있게 된다. 클라인은 이를 ‘우울적 자리(depressive position)’라 불렀다. 여기서 ‘우울적’이라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를 수용하며 느끼는 ‘건강한 슬픔’을 견디는 성숙한 마음 상태를 뜻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강한 불안과 위협을 느끼게 되면, 다시 원초적 분열의 방식으로 퇴행한다는 데 있다. 갈등의 상황에서 상대방을 ‘예전에 함께 동역했던 좋은 면도 있고, 지금 나와 의견이 다른 면도 있는 한 사람’으로 통합해서 보지 않고, ‘처음부터 가면을 쓰고 있던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 순간 수십 년 동안 맺어온 관계는 ‘좋은 사람으로 위장했던 나쁜 사람에게 기만당한 역사’로 뇌리에 새겨진다. 그리고 한번 ‘나쁜 사람’으로 분류된 상대와는 결코 같은 공동체에 머물 수 없다고 단언한다.
2.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회에서 이런 분열이 더 격렬하게 일어날까?
교회 밖에서도 이런 분열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분열이 유독 격렬하고, 회복이 어려워 보인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교회는 ‘좋음’과 ‘옳음’에 대한 기준이 매우 높은 공동체다. 일반적인 모임에서는 “저 사람과 나는 잘 안 맞아” 정도로 생각되는 일도, 교회 안에서는 “저 사람은 신앙이 매우 미성숙한 사람이야”, “저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까?”라는 차원으로 여겨진다. 자신과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을 ‘의견이 다른 사람’을 넘어, ‘영적으로 그릇된 사람’으로 규정되면, 그 사람과의 공존은 곧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 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국 분열은 ‘선택’이 아닌 ‘신앙적 의무’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저 사람이 부럽다’, ‘저 사람에게 화가 난다’, ‘나는 인정받고 싶다’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함은 자신의 미성숙을 드러내는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교인들은 자기 안에 있는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대신 그것을 상대에게 투사한다.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닌 ‘그가 처음부터 미움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이 되며, ‘내가 자리를 탐하는 것’이 아닌 ‘그가 자기 자리를 욕심내는 것’이 된다. 자기 안의 어두운 부분을 상대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은 깨끗한 사람으로 남고, 상대는 나쁜 사람이 된다.
영국의 정신분석가 윌프레드 비온(Wilfred Bion)은 집단이 불안에 직면할 때 ‘투쟁-도피(fight-flight) 기본 가정’이라는 원초적 모드로 퇴행한다고 보았다. 즉 집단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적’을 만들어 함께 맞서거나 함께 도피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응집력을 회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갈등이 격화될 때 교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우리 편’과 ‘다른 편’을 만들고, 저쪽 편을 단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편의 결속을 강화시킨다. 이 메커니즘 안에서 ‘공동의 적’은 사실 공동체가 자신의 불안을 외부로 배출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심리적 장치다.
3. 교회 분열의 심리 과정
한 중형교회의 사례를 보자. 이 교회는 30년 동안 한 목회자가 섬겨 왔고, 은퇴 후 후임자 청빙 과정에서 문제를 겪었다. 한 무리는 전통적 예배와 깊이 있는 강해 설교를 중시하는 후보를 지지했고, 다른 무리는 젊은 세대 사역에 강점이 있는 후보를 지지했다. 이는 충분히 대화로 풀어갈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측의 의견은 미묘하게 변해 갔다. 처음에는 “저 후보의 목회 방향이 우리 교회에 더 적합한 것 같다”였던 표현이, 어느 순간 “저쪽 사람들은 교회를 세속화시키려 한다”, “저쪽은 신앙의 본질을 잃었다”로 변했다. 상대방의 ‘다른 견해’를 이제 ‘미성숙한 신앙’으로 여겼다. 양측 모두 자신들이 지지하는 후보의 단점은 보지 않고, 반대편 후보의 모습 속에서 비난할 것들만 찾아냈다. 청빙 과정에서 알게 된 사소한 정보들조차 ‘저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났다’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결국 청빙은 한쪽이 다른 쪽을 누르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고, 패배한 쪽의 상당수는 교회를 떠나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양쪽 교회 모두 처음에는 “차라리 잘됐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깊은 공허와 상처만 남았다. 이상한 일은, 새로 분리된 두 교회 안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분열의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사례는 분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분열은 일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공동체가 분열의 방식으로 갈등을 제거한 경험을 하게 되면, 이후에 발생되는 갈등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처리하려는 심리적 습관이 생긴다. 즉 그 공동체는 ‘우울적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편집-분열적 자리(paranoid-schizoid position)’에 머물게 된다.
4.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분열
클라인이 말하는 분열은 본래 ‘한 개인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공동체 차원의 분열로 확장될까? 그 매개가 바로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다. 한 사람이 분노, 시기, 욕심, 두려움 등 자기 안의 어두운 감정을 견디지 못할 때, 그는 그 감정을 마치 상대의 것인 양 상대에게 심어 놓는다. 그리고 상대는 그 감정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여 실제로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기 안의 분노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대를 ‘분노 가득한 사람’으로 끊임없이 자극하고 몰아붙이면, 상대는 결국 실제로 분노를 폭발시키게 된다. 그 순간 “봐라, 저 사람이 얼마나 화가 많은 사람인지”라고 자신의 분석이 옳았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실상 자기 안에 있던 감정이 상대에게 ‘옮겨 심어진’ 결과다.
교회 안의 분열 과정에서 이러한 투사적 동일시는 수도 없이 일어난다. 양측은 서로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떠넘기고, 떠넘겨 받은 쪽은 실제 그 어두운 모습대로 반응하며, 그렇게 서로의 ‘나쁨’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쪽이 정말 나쁘다’는 확신은 더욱 견고해진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끊어내지 않으면 결코 자연적으로 멈추지 않는다.
5. 분열을 막는 첫걸음: ‘우울적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이 분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까? 그 답은 ‘우울적 자리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에 있다. 우울적 자리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동시에 내가 미워하는 대상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견뎌내는 마음의 자리다. 이 자리에 머문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저 사람은 완전히 나쁘다’고 단정하는 것이 ‘저 사람에게도 이해할 만한 면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단정은 갈등을 단순화시키고 자신을 깨끗한 자리에 두지만, 통합은 모호함과 불편함, 그리고 자신 안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자각을 동반한다.
교회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한쪽 편을 단호하게 정리해 갈등을 제거해주는 사람’이 아닌, ‘양쪽의 입장 안에 모두 진실의 부분이 있음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양쪽 진영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기 쉽다.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의심받기 쉽고, 때로는 ‘회색분자’라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분열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6. 분열을 다루는 공동체적 실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분열을 막기 위해 실천해야 할 몇 가지 과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면, 더 이상의 생각이 들지 않도록 멈춰야 한다. 이 표현은 예외 없이 분열적 사고의 신호다. 오랜 기간 동안 맺어왔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단정하려는 충동이 들 때, 이는 이미 자기 안에서 분열의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잠시 유보하고 ‘내가 본 저 사람의 모습 외에 혹시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면은 무엇인가’를 다시 떠올려 보는 일이다.
다음으로, 자기 안의 부정적 감정을 인정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신뢰할 만한 목회자, 지도자, 혹은 상담자 앞에서 ‘나는 지금 저 사람이 정말 밉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고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자기감정을 인정하는 일은 그 감정을 정당화하는 일이 아니다. 그 감정을 상대에게 투사하지 않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자기감정 인정이다.
또한 갈등 상황에서 ‘제 3의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공동체 안에 의도적으로 세워야 한다. 양 진영 모두와 대화하고, 양쪽 입장을 모두 들으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갈등을 중재하는 사람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런 사람은 자연 발생적으로 등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공동체가 의식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인정하고 지지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언어가 부정적 감정을 포장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하나님의 뜻’, ‘교회의 거룩성’, ‘진리의 수호’와 같은 표현들이 갈등 상황에서 등장할 때, 그것이 정말 그러한 차원의 문제인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거룩한 언어로 포장된 분열일수록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7. 분열을 넘어 통합으로
교회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로 그 공동체가 무조건 잘못된 공동체라고 비판받아서는 안된다.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나 분열은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분열의 촉발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지혜롭게 다루는 방식이다. 분열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그 방식을 반복하는 공동체와, 분열의 위기를 통해 자기 안의 어두운 부분을 인식하고 통합을 모색해 나아가는 공동체는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모습이야말로 분열의 정반대편에 있는 통합의 모습이다.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단죄하지 않으시고,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그 순간, 인간의 가장 깊은 분열적 충동이 사랑의 통합으로 변환되었다.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 역시 통합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갈등을 회피하거나 모든 차이를 무의미하다고 덮으려는 것이 아니다. 차이와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한 공동체로 함께 머물 수 있는 ‘마음의 성숙’을 이루어 가는 일이다.
분열은 너무나도 쉽게 일어난다. 한 사람을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통합은 너무나도 어렵다. 그 사람의 부족함과 함께 그의 좋음을 기억해 내는 일은 의식적인 노력과 인내, 그리고 자기 자신의 어두운 면을 마주할 용기를 요구한다. 교회는 바로 그 어려운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다. 우리가 그 길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교회는 분열의 용광로가 아닌 화합의 동산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