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과 영성을 갖춘 기독교 지도자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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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를 넘어 은혜로: 교회 안의 비교와 경쟁에서 벗어나는 길 - 교회 내 질투와 경쟁 심리의 원인과 해소 방법 #2 - 사람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여기는 교인들은 타인에게 질투를 느낄 때 ‘나는 더 겸손해야 한다’, ‘타인을 축복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으며 질투의 마음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결심이 전혀 의미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질투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이 흔들리고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런 도덕적 결심만으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ie)는 교회 안의 질투와 경쟁의 이슈를 다루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프랑클은 인간을 단지 쾌락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로만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해했다. 인간은 삶의 의미가 흐려질수록 타인과의 비교에 더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인지, 자기 삶의 고유한 부르심이 무엇인지가 흐려질수록, 인간은 자꾸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된다. 결국 질투의 반대는 무감정, 곧 질투라는 감정을 제거함이 아닌, 삶의 의미를 회복함이다. 1. 비교는 왜 인간을 공허하게 만드는가?비교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자극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스스로를 비교하며 ‘나도 저 사람처럼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비교가 삶의 기본 방식이 되면, 인간은 결코 평안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교는 쉴 새 없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보다 앞서게 되면 또 다시 다른 누군가가 신경 쓰이고, 한 영역에서 인정받으면 다른 영역에서 부족함이 느껴진다.교회 안에서는 이 비교가 더욱 견고하게 작용한다. 교회 밖에서는 물질과 명예가 비교의 기준이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헌신, 봉사, 직분, 영성, 설교 이해도, 기도 생활, 목회자와의 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존재감 등이 비교 기준이 된다. 문제는 이 요소들이 겉으로는 모두 ‘좋은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그래서 비교가 더 쉽게 정당화된다. ‘저 사람처럼 더 기도해야지’라는 말 속에 순수한 열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왜 나는 저 사람만큼 인정받지 못하는가’라는 불안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열심을 다해 공동체를 섬기던 000 권사님은 새로 부임한 목사님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목사님은 교회가 젊어지려면 젊은 교인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면서 각 분야의 리더들을 젊은 교인들로 교체했다. 교회는 활기를 띠지만, 권사님은 자신이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교회의 익숙했던 공간들이 이제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요즘 교회가 너무 가벼워졌다’라며 교회에 대한 비난, 목회자에 대한 원망, 젊은 교인들에 대한 질투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 속에는 ‘나는 이제 더 이상 교회에 필요 없는 사람인가?’, ‘내가 있을 곳이 이제 없네’라는 깊은 공허가 자리잡고 있었다.이처럼 비교는 단지 타인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아닌, 자신의 타인의 위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런데 비교는 사람을 점점 더 공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리는 결코 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의 역할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내 존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는 자신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도록 만든다. 2. 프랑클이 말하는 인간의 갈증: ‘의미’를 잃으면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프랑클은 ‘실존적 공허’를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를 보았다. 이는 우울이나 무료함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이 흐려지고,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공허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평가에 더 쉽게 이끌린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 그리고 그의 좋은 평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앙생활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에 더 치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의식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내 수고를 누가 알아줄까?’를 살피며, ‘혹시 나와 함께 일하는 다른 교인들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라 하며 계속 비교의 관념 속에 있게 된다.프랑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상태는 단순히 질투심이 강한 상태가 아닌, 의미가 상실된, 적어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 상태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향이 선명할 때, 타인의 인정이 중요할 수는 있어도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고, 내 삶의 고유한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인간은 자꾸 타인의 자리를 탐하게 된다. 결국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가 자리잡고, 소명이 흐려진 곳에 경쟁이 자리 잡는다.바로 이것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가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이유이다. 그는 결코‘남을 이기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당신의 삶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앙 안에서 더 깊어진다.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맡기고 계실까?’. 이 질문이 내 안에서 살아나고 이에 답하기를 원할 때, 인간은 남의 길을 부러워하기보다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다. 3. 질투를 없애려 하지 말고, 그 질투가 말하는 결핍을 먼저 들어야 한다질투를 해소하는 첫걸음은 질투심을 억지로 제거하려 함이 아닌, 그 감정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자기 존재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자신은 그 누구보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성실하게 봉사해왔고, 하나님께 진심을 다해 예배해왔지만, 늘 앞에 서서 자기를 드러내는 몇몇 교인들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나는 원래 저런 스타일이 싫다’라고 하며 그 감정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있었고, 천천히 자기 마음을 탐색했다. 그 마음속에는 오랜 시간 쌓여 온 서운함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늘 뒤에서만 일했다’, ‘누구도 내 수고를 모른다’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미워한 것은 사실 그 교인들이 아닌, 그들 앞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자기 안의 결핍이 있었다는 사실을...이런 자각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질투를 단순히 죄책감으로 치부해버리면, 인간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공격적이 된다. 험담이 늘어나고, 냉소가 깊어지고, 관계를 끊거나 소극적으로 방해하는 방식으로 감정이 형성된다. 그러나 질투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그 감정은 오히려 자기 성찰의 출발점이 된다. ‘나는 왜 이토록 인정받고 싶은가’, ‘나는 왜 이 자리에서 쉽게 밀려난다고 느끼는가’, ‘나는 무엇으로 내 존재 가치를 확인해 왔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 앞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 질문은 단지 심리학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깊은 영적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질투는 종종 내 신앙이 실제로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 가운데 있는지,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고 있는지, 아니면 비교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질투는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질투를 느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신앙의 성숙을 위한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4. 프랑클이 제시하는 길: 비교의 시선을 소명의 시선으로 바꾸기인간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고통을 다르게 감당할 수 있다. 자기 삶에 부여된 고유한 의미를 발견할수록, 남과의 비교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비교는 타인의 생각과 행위를 기준으로 삼지만, 의미는 나에게 맡겨진 삶의 길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추상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삶이 매 순간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삶은, 특히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자신의 질투심과 경쟁심, 더 나아가 이기심을 다루는 데 매우 실제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자신도 모르게 교인들이 갖고 있는 은사를 부러워한다. ‘나에게는 왜 저런 은사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어 고통스럽다. 그러나 프랑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왜 저들에게만 저렇게 좋은 은사를 주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가? 나에게 어떤 과제를 맡기셨는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사람들은 각자 마다 다른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내가 타인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맡겨진 사명을 놓치기 쉽다.비교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하고 타인의 빛을 위협으로 보게 하지만,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용기는 내 삶의 책임을 발견하게 하고 내게 맡겨진 작은 빛을 보게 한다. 프랑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바로 이런 식으로 질투를 변환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젠 질투와 경쟁의 에너지를 자기 삶의 책임과 소명의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5. 교회는 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교회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집단 구조와 문화 역시 그 자체로 질투와 경쟁의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떤 교회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질투와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를 만든다. 드러나는 봉사만 칭찬하고, 보이지 않는 수고는 그냥 지나치며, 특정한 직분과 역할만 더 가치 있게 취급하고, 누가 더 충성스러운지 비교하게 만드는 언어를 반복할 때, 교인들은 쉽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매번 앞에 서는 사람들만 칭찬받고,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칭찬도 없다면 그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겉으로는 모두 웃고 있어도, 공동체 안에는 점차 ‘보여야 인정받는다’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렇게 되면 봉사와 예배조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 변질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 드러나기 위해 애쓰고, 어떤 사람은 상처받아 물러서며, 어떤 사람은 냉소적으로 변할 것이다. 결국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그래서 교회는 질투를 단지 개인의 미성숙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공동체의 구조가 무엇을 강화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목회자와 리더는 누구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지, 그 인정의 기준은 무엇인지, 특정 인물만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눈에 띄는 역할만 영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얼마나 가시적인 성과를 냈는가에 집중한다. 교회 밖에서는 이러한 기준이 여전히 통용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그래야 할까? 그러면서 교회에서 만큼은 그러면 안된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매우 모순적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 각각 다른 자리에서 자기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교회다. 어떤 교인은 앞에서 섬기고, 어떤 교인들은 뒤에서 지지하며, 어떤 교인은 조용히 기도하고, 어떤 교인은 길 잃은 한 영혼을 소리 없이 오래 돌본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커 보이느냐가 아닌, 각자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느냐다.질투를 이기는 길은 남보다 더 높아지는 데 있지 않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 데도 있지 않다. 그 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고유한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데 있다. 빅토르 프랑클의 말처럼, 인간은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견딜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의미를 잃은 공동체는 비교하고 경쟁하지만, 의미를 회복한 공동체는 서로를 세운다. 결국 은혜란, 남을 이기고 얻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게 되는 자리다.
“왜 교회 안에서도 질투하게 될까?” - 교회 내 질투와 경쟁 심리의 원인과 해소 방법 #1 - 교회는 서로를 지지하고 위로하면서 기도를 통해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새기는 공동체다. 그런데 실제 교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단지 거룩함과 아름다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교인들의 감정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한 가운데 질투와 경쟁심이 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교회 내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인정받지 못함에 서운해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열심과 열정을 질투한다. 이러한 감정은 교회 밖보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더 복잡하고 은밀하게 형성되고 작동된다.교인들은 절대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다른 교인에서 질투를 느낀다고 해서 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다른 교인들로부터 자신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투는 자기 안 깊숙이 숨겨진다. 물론 숨겨졌다고 해서 이 질투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은밀하고 더 종교적인 형태로 자기 안에, 더 나아가 공동체 안에 머문다. 따라서 교인들의 질투와 경쟁심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고 회피하거나 은폐할, 그리고 고쳐야 할 문제로 보기보다는, 이 감정은 인간의 깊은 불안과 결핍, 인정 욕구와 비교 심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증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1. 질투는 왜 교회 안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인가?세상은 질투로 가득 차 있다. 직장에서는 승진, 성과, 연봉, 영향력으로 인해 비교가 일어나고, 학교에서는 성적과 친구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그리고 이 비교와 경쟁은 사회생활에서 당연시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뇌리 속에 교회는 그런 세속적 비교와 경쟁을 초월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관념과 기대가 강하다. 교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며, 각자 받은 달란트에 맞게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배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느끼는 질투의 감정을 교회 안에서 드러내기 어렵다.‘나는 엄두도 못 낼 만큼 저렇게 많은 헌금을 하는 000 권사님이 정말 부럽다’고 표현하거나, ‘왜 목사님은 000 집사만 신임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라고 털어놓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감정은 곧바로 미성숙하거나 믿음 없는 모습으로 해석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인정하기보다 다른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 불편한 마음을 ‘분별’로 포장하고, 서운함을 ‘원칙’으로 둔갑시키며, 경쟁심을 ‘교회를 위한 충정’으로 표현한다. 이 때 교회 안의 질투는 더 복잡해진다. 세상에서 경쟁은 순수하게 경쟁으로 드러나지만, 교회에서는 경쟁이 종교적 언어 속에 은폐된다. 겉으로는 신앙의 열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정 욕구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얼핏 교회를 위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타인을 견제하고 싶은 마음이 실린 경우도 있다. 따라서 교회 안의 질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드러난 표면을 넘어, 그 감정이 어떤 심리 배경에서 생겨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2. 질투의 근원에는 미움보다 먼저 상처받은 자기감이 있다질투는 흔히 타인을 향한 ‘못된 감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실제로 질투의 더 깊은 차원에는 타인에 대한 미움만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누군가를 질투함은 그 사람이 단지 눈에 거슬린다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내 안의 결핍과 열등감, 인정 욕구가 자극되고 있음을 뜻한다.예를 들어, 교회에서 정말 오랫동안 봉사해 온 집사님이 있다. 그는 교회학교, 속회, 교회 내 각종 행사에서 늘 성실하게 일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교회에서 온 젊은 집사가 찬양팀에 서게 되고, 목회자와 자주 소통하며 교회의 여러 봉사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있음을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애썼는데 왜 나는 저만큼 인정받지 못했을까?’, ‘이제 봉사를 그만 해야 하나? 내가 좋아서 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라는 감정이 일어났지만, 이를 누군가에게 표현하거나 티도 낼 수 없었다.사실 그 집사님의 인격에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 있던 인정받고 싶은 마음, 보상받고 싶은 기대, 자신의 존재 가치의 상실에 대한 불안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정신분석적으로 질투는 타인을 공격하려는 감정인 동시에, 흔들리는 자기감을 붙들기 위한 반응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느끼지 못할 때, 타인의 인정과 위로를 자신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처럼 여긴다. 그때 타인은 축복의 대상이 아닌 위협의 대상으로 바뀐다.결국 질투는 “저 사람이 싫다”보다 “저 사람 앞에선 내가 초라해진다”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질투를 단지 도덕적 문제로만 다루면 안 된다. 교회 안의 질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상처받은 자기감과 흔들리는 존재 가치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3. 교회에서는 질투가 어떻게 더 거룩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가?교회 안에서 질투는 노골적으로 표현되는 경우 보다는 신앙적 얼굴을 하고 나타날 때가 많다. 바로 이 점이 질투로 인한 갈등과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질투를 느끼는 본인조차 그것이 질투인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이다.한 여성 교인이 있다. 그녀는 다른 교인들이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성경공부에도 적극적이며,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칭찬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교인들이 부럽다’는 자기 마음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신앙생활을 조용하고 겸손하게 해야지, 저렇게 잘난 티를 내면 신앙이 없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로 신앙생활을 남들 보란 듯이 과시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언제나 순수한 분별만은 아님을 비판하는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 그 안에는 ‘나는 왜 저만큼 열심을 내지 못하는가’, ‘왜 사람들은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인정하는가”라는 감정이 숨어 있다.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특정 교인들과 가까이 하며 그들을 자주 칭찬한다. 그때 교인들 중에는 겉으로는 티내지 않지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그 감정은 ‘나는 상처받았다’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목회자의 목회 방침이 공정하지 않다’, ‘목회자가 교인들을 차별한다’, ‘목회자는 정치적-금전적으로만 사람을 판단한다’라는 비난의 형태로 나오기도 한다. 물론 실제 목회에 있어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자리와 가치가 상실되었다고 느끼는 심리가 섞여 있을 수도 있다.이처럼 교회 안에서의 질투는 때때로 험담, 냉소, 비꼼, 거리두기, 소극적 공격, 무관심, 배제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는 ‘기도제목을 나누자’는 명분 아래 상대의 약점이 퍼지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는 ‘교회를 위한 충성심’이라는 말이 사실상 경쟁자를 견제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교회를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사실 질투와 경쟁심이 그 배후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행위의 표면만 보지 말고, 그 말과 행동이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4. 교회 안의 경쟁은 신앙 경쟁이 아닌, 존재 가치의 경쟁일 수 있다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질투와 경쟁은 단순히 봉사를 더 잘하고 싶다거나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고 싶다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 분석해보면 그 심리의 심층에는 ‘존재 가치’에 대한 경쟁이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누가 더 믿음이 좋아 보이는지, 누가 더 헌신적인지, 누가 더 영적으로 보이는지, 누가 더 중요한 자리에 서는지, 누가 더 목회자의 신임을 얻는지가 곧 자기 가치의 척도가 되어 버린다.이는 특히 한국 교회 문화 속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교회에서는 분명 겸손이 중요하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헌신, 내세워진 봉사, 공식적 직분, 리더와의 관계, 공개적인 인정과 칭찬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교회 내에 팽배하다. 연말에 교인들을 위한 시상의 목록만 봐도 이에 대해 부정하는 교회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은 하나님의 시선보다 공동체와 목회자의 시선을 더 의식하게 된다. 즉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보다 교회 공동체원 앞에서의 존재감이 더 중요해진다.어느 교인이 수년간 별다른 직분 없이 묵묵히 예배를 드려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보다 나중에 온 사람이 직분을 받고, 여러 모임의 리더를 맡았다. 겉으로는 웃으며 축하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 후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별일 아닌 매우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고, 설교마저 ‘누군가를 겨냥한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문제의 시작은 직분 자체가 아닌, 직분을 통해 자기 존재 가치가 확인된다고 믿는 마음에 있었다.이처럼 교회 내 교인들 사이에서의 경쟁은 역할 경쟁을 넘어, ‘나는 이 공동체 안에서 가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과 연동되어 있다. 그러므로 질투를 없애기 위해서는 타인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무엇으로 내 가치를 확인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평가로 자신을 측정할 때, 교회는 쉼의 장소가 아닌 끊임없는 비교와 갈등의 장소로 변할 수 있다. 5. 질투를 정죄하기 전에, 그 감정이 말하는 상처에 대해 먼저 경청해야 한다교회 안의 질투와 경쟁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위험한 방식은 그것을 곧바로 정죄하는 것이다. 질투가 건강한 감정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질투를 느끼는 사람에게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된다’,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그 질투의 감정을 더 깊이 은폐한다. 그 은폐된 감정은 변화되지도 않고 오히려 왜곡된 방식으로 계속 공동체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질투를 다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는 왜 저 사람을 볼 때 불편한가’. ‘내가 빼앗겼다고 느끼는 것은 대체 뭘까?’. ‘나는 정말 저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면 저 사람 앞에서 초라해지는 내 모습이 견디기 어려운건가?’ 이런 질문은 타인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의 진실을 만나게 하는 질문이다.그리고 교회도 이런 질문을 왜곡 없이 하도록 돕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질투를 느끼지 않는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는 현실에 없다. 성숙한 공동체는 질투와 경쟁이 없는 공동체가 아닌, 그런 감정을 신앙 뒤에 은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도록 인도하는 공동체, 누군가의 성공 앞에서 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흔들림을 통해 내 안의 상처와 결핍을 보게 안내하는 공동체다.또한 목회자들은 공동체의 구조가 질투를 부추기고 있지 않은지도 점검해야 한다. 목회자가 특별히 선호하는 특정 교인들만 계속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드러나는 봉사만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교인들의 비교를 자극하는 칭찬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지, 사역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교회가 의도하지 않게 경쟁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면, 개인의 경건만 강조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결국 교회 안의 질투는 세속적 경쟁심이 교회 안으로 들어온 단편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신앙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도구로 변질될 때 나타나는 병리적 현상이다. 질투는 그래서 내 안에서 무엇이 흔들리고 있는지, 갈등을 촉발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로 이해될 수 있다. 질투를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제 질투의 감정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교인들의 심리 - 교회 안의 권위와 침묵이 남기는 상처 - 어느 공동체나 리더가 존재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 리더에게 일정부분 권위와 권한을 부여한다.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리더,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 중심을 잡는 리더, 중요한 순간에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책임 있게 제시하는 리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리더 역할을 목회자가 해주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존중으로 그의 리더십을 지지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크고 작은 어려움이 시작되기도 한다. 목회자를 향한 존중과 신뢰가 어느 순간 지나친 의존으로 기울 때, 건강한 리더십이 ‘비판하기 어려운 무엇’으로 굳어질 때, 교회 공동체는 미묘한 긴장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말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어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리더의 통제적 태도가 누구의 문제 제기도 받지 않은 채 지속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우리는 흔히 ‘목회자가 너무 독단적이다’ 혹은 ‘교인들이 너무 의존적이다’라고 쉽게 말한다. 솔직히 그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 안의 권위 문제는 그렇게 한쪽의 책임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어떤 목회자가 처음부터 권위적이었을까? 사실 권력과 달리 ‘권위’는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부여할 수 없고, 오직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여받아야만 하는 요소다. 다시 말해 목회자의 권위는 교인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형성되며, 동시에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신앙적 지도와 안내를 기대한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슨 이유로 교인들이 강한 리더를 선호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목회자에게 의존하게 되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보다 목회자의 생각과 판단에 기대게 되는 그 심리적 구조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 안의 권위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 안에는 불안과 의존, 죄책감 그리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이것은 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함께 마주해야 할 마음의 배경이다. 1. 강한 리더십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교인의 마음어느 교회의 한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저는 목사님이 삶의 지침을 주시면 정말 마음이 편하더라구요. 제가 결정해서 움직이는 건 항상 불안하거든요. 괜히 잘못 판단해서 하나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의 짧은 고백 안에는 교회 안의 권위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누군가에게 강한 리더가 부담스럽고 불편한 존재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실존적 불안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일 수 있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일에는 선택뿐 아니라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책임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저항하고 싶고, 회피하고 싶다. 특히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틀리면 안 된다’는 마음이 강한 사람일수록, 누가 분명하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해주는 상황을 더 편안해하고 안전하게 느낀다. 그런 사람에게 강한 리더는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불안을 대신 짊어져 주는 고마운 존재처럼 다가온다.교회 안에서는 이 마음이 한층 더 강해진다. 사람들은 교회를 신앙과 구원, 하나님 뜻, 옳고 그름을 다루는 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판단이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은 단순한 실수의 걱정으로 끝나지 않고, 자칫 신앙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진 교인에게는 대화를 통해 함께 자기 마음을 살피며 스스로 삶의 방향을 분별하도록 돕는 리더보다,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알려주어 고민의 무게를 덜어주는 리더가 훨씬 더 의지가 되는 매력적인 존재로 느낀다. 2. 왜 어떤 교인들은 ‘목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라고 말하는 걸까?“솔직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죠. 그런데 목사님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요. 괜히 말했다가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기도 하구요.” 교회 안에서 결정해야 할 중대 사안이 있었다. 다소 무리한 결정이라고 느끼며 우려를 표하는 교인들이 몇몇 있었지만, 교인들 대부분은 목회자가 단독으로 결정하고 처리하는데 동의했고, 그대로 실행됐다. 이 과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교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런 장면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친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의견이 없어 침묵하는 경우보다, 의견이 있음에도 말하지 못해 침묵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이면에는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운 마음, 괜히 나서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일까하는 우려, ‘혹시 내가 영적으로 부족한 것은 아닐까’하는 자기 의심이 자리한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씀하셨으니까…’라는 표현은 존중의 언어면서, 동시에 자기 생각을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한 청년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는 중요한 일이 생기면 꼭 목사님께 여쭤봐요. 제가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그래야 안심이 됩니다. 혼자 결정하면 괜히 불안해요.” 누구보다 성실히 신앙생활을 해 온 이 청년의 마음 한켠에는 ‘혹시 틀릴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누군가를 실망시킬까봐’라는 긴장이 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해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목회자에게 이 부정적 감정들을 투사하며 정신적 안정을 찾고자 했다. 이런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목회자에 대한 의존은 단순히 존경이나 충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많은 경우 그것은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줄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어떤 교인이 특정 리더에게 유난히 매달리거나, 그의 인정에 깊이 기대고 있다면, 그 안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 버려지기 싫은 마음, 아직은 혼자 서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함께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인들을 대하는 목회자는 어떻게 이들을 대해야 할까? 건강한 권위는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묵살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생각하게 하고, 더 책임 있게 분별하도록 돕는다. 반면 미성숙한 권위는 질문을 막고, 고민을 가볍게 여기게 하면서,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게 한다. 처음에는 그런 권위가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질문할 필요도, 고민할 여지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교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점차 잃게 되고, 공동체는 한 사람의 기분과 판단에 지나치게 흔들리는 자리가 되어 간다. 곧 목회자의 기분과 판단에 지나치게 동요한다. 3. 권위가 ‘하나님의 뜻’처럼 느껴질 때...교회 안의 권위 문제가 다른 공동체에서 보다 한층 더 조심스레 다뤄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리더십의 차원을 넘어 신앙과 양심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상사의 말은 업무 지시로 들린다. 그러나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영적 권위를 부여하고, 그에 순종하기로 이미 마음먹은 상태이기에, 목회자의 말에는 자연스레 영적인 무게가 실린다. 이는 신앙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섬세하게 살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 안에서 어떤 교인의 마음에는, 목회자에 대한 비판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흐릿하게 겹쳐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 마음에 걸리는 일을 겪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던 한 교인의 고백이다. "제가 그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계속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참고 넘어가야 하나? 이걸 말하면 내가 교만한 건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내가 대드는 건 아닐까?’ 결국 아무 말도 못 했죠." 이런 고민을 안고 있는 교인은 생각보다 많다. 상처를 받아도, 어색한 구조를 인지해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도, 마음 한쪽에서는 곧바로 신앙적 자기 검열이 작동한다. ‘내가 더 겸손해야 하나?’, ‘내가 더 순종해야 하나?’, ‘이걸 참는 게 믿음 아닐까?’ 인내와 겸손이 신앙인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다만 그것이 모든 침묵을 미덕으로 미화할 때, 교회 안에는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조용히 쌓여 가게 된다. 그래서 건강한 권위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통해 공동체가 더 깊어진다고 믿는다. 반면 권위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질문이 권위에 대한 위협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면 의도하지 않은 사이 말하는 사람은 문제 인물로 보이고, 침묵하는 사람은 충성된 사람으로 비치게 된다. 이는 누구의 악의에서 비롯된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점검해 보아야 할 공동체적 과제다. 4. 강한 리더의 마음 안에도 불안이 있다.이쯤해서 한 가지 짚어 봐야 할 사안이 하나 있다. 앞서 언급했듯 교회 안의 권위 문제는 교인들만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목회자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 공동체의 리더라면 자기 안의 불안과 두려움을 완벽하게 다스리기는 어렵더라도, 그것이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 고민을 작은 실천으로 옮기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는 목회자에게만 요구되는 무거운 짐이라기보다, 사람을 돌보는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마주하고 있는 과제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하게 행사하는 리더들은, 종종 자기 안의 불안을 충분히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더 분명한 통제와 결단을 통해 그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무의식적 선택을 한다. 물론 그가 그렇게 선택한 표면적인 이유는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불안과 두려움을 권위로 포장된 통제와 지배로 은폐하려는 자기 보호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다. 즉 권위는 공동체를 돌보는 기능으로부터 벗어나, 리더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기능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인들의 반응에 유난히 마음이 쓰이는 목회자가 있다. 누군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면, 그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다양성이라고 인식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대한 도전처럼 느껴질 수 있다. 공동체 안에 여러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불안이 마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그것이 질서의 균열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통제의 의지는 자연스레 강해지고, 주변에는 점차 비슷한 결의 의견들만 남게 된다.이런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결단력 있고 카리스마 있게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작은 비판조차 인격적 공격처럼 다가오는 흔들리는 자존감,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기 어려운 깊은 갈망,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모습은 사실 목회자뿐만 아닌, 공동체 내에서 책임이 주어진 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모습이다. 이를 알아차리고 천천히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때, 권위는 자기 보호의 도구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5. 성숙한 권위와 미성숙한 권위는 무엇이 다를까?그렇다면 교회 안의 건강한 권위는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다. 권위가 사람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살펴보면 된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권위는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그 권위 아래에서는 ‘깊이 생각하기보다 따르라’는 분위기가 우세해지고, 당연히 질문은 환영받지 못하며, ‘다름’은 종종 ‘틀림’으로 해석된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길 힘을 조금씩 잃는다. 그런 분위기 안의 공동체에는 자연스레 위축감이 스며든다. 반면 성숙한 권위는 사람을 자라나게 한다.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르도록 만들기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의견을 깊이 경청하며, 공동체원들이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힘을 키워 가도록 돕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절대시하지 않고, 자신 역시 때로는 실수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권위 아래에서 교인들은 점점 더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해 간다. 6. 교회는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목회자와 교인 모두가 권위 문제에 조심하기 위해 우선 실천해야 할 과제는 ‘침묵을 무조건 미덕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다. 조용히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평안한 것은 아니다. 순종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 건강하지도 않다. 어떤 침묵은 믿음의 자리에서 나오지만, 또 어떤 침묵은 두려움 속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어떤 순종은 성숙의 표현이지만, 또 어떤 순종은 관계를 잃지 않으려는 자기 보호일 수 있다. 이 차이를 섬세하게 구분하는 시선이 공동체를 한 걸음 더 성장하게 만든다. 또한 교회 공동체는 목회자를 지나치게 이상화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목회자는 존중받아야 할 자리에 있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존재는 아니다. 목회자 역시 실수할 수 있고, 감정적으로 흔들릴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의 상처와 불안 속에서 반응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목회자와 교인들 모두 받아들일 때 오히려 공동체는 더 건강해진다. 목회자를 너무 이상적으로 그리려는 시선은 결국 교인뿐만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돌아온다. 인간적인 한계가 인정될 때, 신앙의 자리는 드디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 교인들을 위해, 그리고 목회자를 위해 ‘생각할 수 있는 자리’를 함께 마련해 가는 일이다. 질문을 꺼낼 수 있는 분위기, 다른 의견을 말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경험, 실수해도 비난받지 않는 안전함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 권위는 진정 사람을 세우는 힘이 된다. 7. 참된 권위는 사람을 크게 만든다지금까지 교회 안의 권위 문제와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 살펴보았지만, 이는 결코 교회 안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사라져야 할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여전히 가르침도 필요하고, 인도도 필요하며, 책임 있는 리더십도 반드시 필요하다. 권위 자체를 의심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권위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우리 모두가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특히 목회자의 권위가 본의 아니게 교인들을 위축시키고 침묵하게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권위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다. 참된 권위는 사람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을 두렵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생각과 믿음, 책임과 용기가 자라도록 돕는다. 성숙한 리더로서 목회자는 교인들을 자기 곁에 묶어 두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발로 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도와주고, 함께 걸어간다. 그리고 그 길은 목회자 혼자 걷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걸어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런 권위를 함께 회복해 갈 수 있다면, 권위는 더 이상 누군가를 억압하는 무게가 되지 않고, 교회를 건강하게, 그리고 성숙하게 세우는 가장 따뜻한 힘이 될 것이다.
6회차. 교회에서 가장 헌신하던 사람이 지치는 이유 — 봉사자의 번아웃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심리 — 교회 안에서 반복되는 모습들 가운데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는 장면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하던 교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출 때다. 교회 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항상 솔선수범한 자세로 봉사하고, 다른 교인들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때 먼저 다가가 위로하며 자기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던 교인들이 일순간 ‘이제는 조금 쉬고 싶다’며 공동체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른 교인들은 당황해 한다. 그들은 그 교인들에 대해 “신앙이 식은 것 아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약해진거야?”라며 쉽게 평가한다. 하지만 실제로 번아웃을 경험하는 교인들의 상당수는 신앙의 약화 때문이 아닌,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깊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 왔기 때문에 지친다.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번아웃은 게으름의 결과라기보다 과잉된 헌신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현상을 단지 체력 문제나 신앙 열정의 부족으로 설명하려 할 때, 그 이면에서 일어나는 더 깊은 심리 과정에 대해 탐색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1. 봉사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변화 처음 봉사를 시작할 때 사람들은 기쁨과 감사함을 경험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감각,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내적 만족이 동시에 찾아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쁨과 감사는 서서히 압박으로 변해 간다. 맡은 역할이 늘어나면서 책임감도 함께 커지고, ‘내가 더 잘해야지’라는 다짐은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라는 초조함으로 변한다. 어떤 상황에 있어도 결코 새벽예배를 거른 적이 없고, 교회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교회에 나와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권사님이 있다. 교인들은 권사님을 보며 ‘정말 신실한 분’이라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권사님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이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정말 봉사하길 원하는데, 솔직히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말하면... 예전에는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울고 웃었을 텐데... 이제는 그냥 피하고 싶어지네요.” 이를 피로가 누적되어 발생된 상태라고 보기에 분명 무리가 있다. 오히려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정서적 소진(Emotional Exhaustion)에 가까우며, 이는 타인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2. 코훗의 자기심리학으로 보는 헌신과 소진 하인즈 코훗(Heinz Kohut)의 자기심리학은 인간이 건강한 자기(Self)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심리적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타인과의 공감적 관계를 통해 인간은 자기 구조를 강화하고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자기대상(Self-Object)’이다. 이는 자기를 지지하고 이해하며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관계를 통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상을 말한다. 건강한 자기 구조는 이러한 관계적 경험을 통해 유지된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많은 교인들이 타인에게는 자기대상이 되어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자기대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즉, 그들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하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은 어디에도 안전하게 기대지 못한다. 결국 타인을 공감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공감의 에너지가 자기 안에서 고갈된다. 이 지점에서 번아웃이 시작된다. 3.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과부하된 순간 교회 공동체에 헌신적인 사람들에게는 공감 능력이 높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누군가가 힘들다 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며, 공동체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살펴 모두가 행복한 방법,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한다. 문제는 이러한 공감이 적절한 경계 없이 지속될 경우, 공감 과부하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즉 타인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타인을 소외당하지 않게 하려다 정작 자신이 소외당하는 경험을 한다. 교회의 청년부에서 리더 역할을 하던 학생과 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함께 지내는 청년부원들과 함께 얘기를 하다보면, 집에 가서도 그들 생각이 계속 나요. 밤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힘들다고 말하면 리더답지 못한 것 같이 느껴져서 얘기를 못 하겠어요.” 자기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그는 타인의 감정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것을 소화하고 회복할 수 있는 자기 구조의 지지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었다. 즉 그에게 있어 공감은 더 이상 은혜로운 능력이 아닌, 자기소진의 통로였다. 4. 헌신이 내 가치가 되는 순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봉사를 할 때 겪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위험은 ‘자기 가치가 역할과 결합되는 순간’에 등장한다. ‘내가 이 역할을 내려놓으면 나는 어떤 존재로 여겨질까?’라는 질문이 마음 속에서 생기면, 봉사는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존재 근거가 된다. 코훗은 자기 구조가 불안정할 때 인간은 타인의 인정과 반응을 통해 존재감을 유지하려 한다고 보았다. 교회 안에서 쉬지도 못할 정도로 계속 일을 맡아 하고, 모든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도 여기에 있다. 봉사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의미 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헌신은 은혜에서 나오는 봉사가 아닌, 자기 유지를 위한 심리적 전략에 기인한 행동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마음에서는 이런 외침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5. 번아웃은 실패가 아니라 신호다 교회 안에서 번아웃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큰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믿음이 부족해서 지친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잘만 하는데 나만 이렇게 힘든 이유는 내가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을 덜 사랑해서인가?’ 그러나 번아웃은 신앙의 실패로 인한 결과라기보다는, 자기 구조가 더 이상 무리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신호에 가깝다. 자기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회복을 향한 중요한 전환점일 수 있다. 이제는 타인을 돌보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는 신호, 공감만큼 경계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6. 건강한 헌신으로 가는 길 헌신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소모시키는 방식을 피하고, 자신과 타인이 함께 살아나는 방식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먼저 봉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봉사란 하나님 은혜의 흐름임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반드시 ‘내가 해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가 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공감에도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 따라 실천해야 한다. 타인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과 그것을 모두 짊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공감은 동행이지 흡수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을 공감해 줄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코훗이 말한 자기대상 경험은 교회 안의 리더와 봉사자들에게 더 절실하다. 돌보는 사람 역시 돌봄 받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가장 많이 일하는 사람을 세우기보다, 오래도록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 가는 곳이어야 한다. 타오르는 열정은 공동체를 순간적으로 밝힐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헌신은 공동체를 오랫동안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헌신하는 사람이 지치는 것은 결코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매우 인간적인 반응이다.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지쳤을 때 잠시 멈추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지지하는 공동체가 되는데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신 역시 사람을 소모시키는 방식을 넘어, 교인들이 편안하게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방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소외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돌보는 사람들은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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