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를 넘어 은혜로: 교회 안의 비교와 경쟁에서 벗어나는 길
- 교회 내 질투와 경쟁 심리의 원인과 해소 방법 #2 -
사람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여기는 교인들은 타인에게 질투를 느낄 때 ‘나는 더 겸손해야 한다’, ‘타인을 축복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잡으며 질투의 마음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결심이 전혀 의미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질투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무엇이 흔들리고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런 도덕적 결심만으로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Frankl)의 로고테라피(Logotherapie)는 교회 안의 질투와 경쟁의 이슈를 다루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프랑클은 인간을 단지 쾌락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존재로만 보지 않고 근본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로 이해했다. 인간은 삶의 의미가 흐려질수록 타인과의 비교에 더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인지, 자기 삶의 고유한 부르심이 무엇인지가 흐려질수록, 인간은 자꾸 타인의 눈치를 보게 된다. 결국 질투의 반대는 무감정, 곧 질투라는 감정을 제거함이 아닌, 삶의 의미를 회복함이다.
1. 비교는 왜 인간을 공허하게 만드는가?
비교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자극하기도 한다. 누군가와 스스로를 비교하며 ‘나도 저 사람처럼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비교가 삶의 기본 방식이 되면, 인간은 결코 평안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비교는 쉴 새 없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누군가보다 앞서게 되면 또 다시 다른 누군가가 신경 쓰이고, 한 영역에서 인정받으면 다른 영역에서 부족함이 느껴진다.
교회 안에서는 이 비교가 더욱 견고하게 작용한다. 교회 밖에서는 물질과 명예가 비교의 기준이 되지만, 교회 안에서는 헌신, 봉사, 직분, 영성, 설교 이해도, 기도 생활, 목회자와의 관계, 공동체 안에서의 존재감 등이 비교 기준이 된다. 문제는 이 요소들이 겉으로는 모두 ‘좋은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그래서 비교가 더 쉽게 정당화된다. ‘저 사람처럼 더 기도해야지’라는 말 속에 순수한 열망이 있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왜 나는 저 사람만큼 인정받지 못하는가’라는 불안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열심을 다해 공동체를 섬기던 000 권사님은 새로 부임한 목사님 때문에 심적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목사님은 교회가 젊어지려면 젊은 교인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면서 각 분야의 리더들을 젊은 교인들로 교체했다. 교회는 활기를 띠지만, 권사님은 자신이 밀려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교회의 익숙했던 공간들이 이제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요즘 교회가 너무 가벼워졌다’라며 교회에 대한 비난, 목회자에 대한 원망, 젊은 교인들에 대한 질투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 속에는 ‘나는 이제 더 이상 교회에 필요 없는 사람인가?’, ‘내가 있을 곳이 이제 없네’라는 깊은 공허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처럼 비교는 단지 타인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행위가 아닌, 자신의 타인의 위치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런데 비교는 사람을 점점 더 공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타인의 자리는 결코 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의 역할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내 존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는 자신을 더 불안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삶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도록 만든다.
2. 프랑클이 말하는 인간의 갈증: ‘의미’를 잃으면 타인을 바라보게 된다.
프랑클은 ‘실존적 공허’를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를 보았다. 이는 우울이나 무료함을 뜻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이 흐려지고,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공허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평가에 더 쉽게 이끌린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 그리고 그의 좋은 평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줄 것처럼 느끼게 된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앙생활이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가’에 더 치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의식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내 수고를 누가 알아줄까?’를 살피며, ‘혹시 나와 함께 일하는 다른 교인들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라 하며 계속 비교의 관념 속에 있게 된다.
프랑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상태는 단순히 질투심이 강한 상태가 아닌, 의미가 상실된, 적어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린 상태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향이 선명할 때, 타인의 인정이 중요할 수는 있어도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 모르고, 내 삶의 고유한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인간은 자꾸 타인의 자리를 탐하게 된다. 결국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 비교가 자리잡고, 소명이 흐려진 곳에 경쟁이 자리 잡는다.
바로 이것이 프랑클의 로고테라피가 오늘날 교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이유이다. 그는 결코‘남을 이기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당신의 삶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앙 안에서 더 깊어진다. ‘하나님은 지금 내게 무엇을 맡기고 계실까?’. 이 질문이 내 안에서 살아나고 이에 답하기를 원할 때, 인간은 남의 길을 부러워하기보다 자기 길을 걷기 시작한다.
3. 질투를 없애려 하지 말고, 그 질투가 말하는 결핍을 먼저 들어야 한다
질투를 해소하는 첫걸음은 질투심을 억지로 제거하려 함이 아닌, 그 감정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탐색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자기 존재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은 그 누구보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성실하게 봉사해왔고, 하나님께 진심을 다해 예배해왔지만, 늘 앞에 서서 자기를 드러내는 몇몇 교인들을 볼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 처음에는 ‘나는 원래 저런 스타일이 싫다’라고 하며 그 감정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스로를 정직하게 돌아보는 계기가 있었고, 천천히 자기 마음을 탐색했다. 그 마음속에는 오랜 시간 쌓여 온 서운함이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나는 늘 뒤에서만 일했다’, ‘누구도 내 수고를 모른다’라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이 미워한 것은 사실 그 교인들이 아닌, 그들 앞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자기 안의 결핍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자각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질투를 단순히 죄책감으로 치부해버리면, 인간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공격적이 된다. 험담이 늘어나고, 냉소가 깊어지고, 관계를 끊거나 소극적으로 방해하는 방식으로 감정이 형성된다. 그러나 질투를 정직하게 바라보면, 그 감정은 오히려 자기 성찰의 출발점이 된다. ‘나는 왜 이토록 인정받고 싶은가’, ‘나는 왜 이 자리에서 쉽게 밀려난다고 느끼는가’, ‘나는 무엇으로 내 존재 가치를 확인해 왔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 앞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 질문은 단지 심리학적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깊은 영적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질투는 종종 내 신앙이 실제로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지, 아니면 사람들의 인정 가운데 있는지, 내가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고 있는지, 아니면 비교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질투는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질투를 느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신앙의 성숙을 위한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4. 프랑클이 제시하는 길: 비교의 시선을 소명의 시선으로 바꾸기
인간은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고통을 다르게 감당할 수 있다. 자기 삶에 부여된 고유한 의미를 발견할수록, 남과의 비교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비교는 타인의 생각과 행위를 기준으로 삼지만, 의미는 나에게 맡겨진 삶의 길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삶의 의미를 추상적 개념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삶이 매 순간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나는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삶은, 특히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자신의 질투심과 경쟁심, 더 나아가 이기심을 다루는 데 매우 실제적인 전환점을 제공한다.
자신도 모르게 교인들이 갖고 있는 은사를 부러워한다. ‘나에게는 왜 저런 은사가 없지?’라는 생각이 들어 고통스럽다. 그러나 프랑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질문은 분명 달라져야 한다. ‘하나님은 왜 저들에게만 저렇게 좋은 은사를 주셨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는가? 나에게 어떤 과제를 맡기셨는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사람들은 각자 마다 다른 은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내가 타인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맡겨진 사명을 놓치기 쉽다.
비교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하고 타인의 빛을 위협으로 보게 하지만,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용기는 내 삶의 책임을 발견하게 하고 내게 맡겨진 작은 빛을 보게 한다. 프랑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바로 이런 식으로 질투를 변환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젠 질투와 경쟁의 에너지를 자기 삶의 책임과 소명의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5. 교회는 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기에 집단 구조와 문화 역시 그 자체로 질투와 경쟁의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떤 교회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질투와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를 만든다. 드러나는 봉사만 칭찬하고, 보이지 않는 수고는 그냥 지나치며, 특정한 직분과 역할만 더 가치 있게 취급하고, 누가 더 충성스러운지 비교하게 만드는 언어를 반복할 때, 교인들은 쉽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매번 앞에 서는 사람들만 칭찬받고,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칭찬도 없다면 그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겉으로는 모두 웃고 있어도, 공동체 안에는 점차 ‘보여야 인정받는다’는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렇게 되면 봉사와 예배조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방식으로 변질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 드러나기 위해 애쓰고, 어떤 사람은 상처받아 물러서며, 어떤 사람은 냉소적으로 변할 것이다. 결국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 장소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교회는 질투를 단지 개인의 미성숙으로만 치부하지 말고, 공동체의 구조가 무엇을 강화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목회자와 리더는 누구를 어떻게 인정하고 있는지, 그 인정의 기준은 무엇인지, 특정 인물만을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눈에 띄는 역할만 영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한다. 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누군가를 평가할 때 얼마나 가시적인 성과를 냈는가에 집중한다. 교회 밖에서는 이러한 기준이 여전히 통용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그래야 할까? 그러면서 교회에서 만큼은 그러면 안된다고 모두가 생각한다. 매우 모순적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는 교인들 각각 다른 자리에서 자기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교회다. 어떤 교인은 앞에서 섬기고, 어떤 교인들은 뒤에서 지지하며, 어떤 교인은 조용히 기도하고, 어떤 교인은 길 잃은 한 영혼을 소리 없이 오래 돌본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커 보이느냐가 아닌, 각자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느냐다.
질투를 이기는 길은 남보다 더 높아지는 데 있지 않다. 더 많은 칭찬을 받는 데도 있지 않다. 그 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삶의 고유한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데 있다. 빅토르 프랑클의 말처럼, 인간은 의미를 발견할 때 비로소 견딜 수 있고,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의미를 잃은 공동체는 비교하고 경쟁하지만, 의미를 회복한 공동체는 서로를 세운다. 결국 은혜란, 남을 이기고 얻는 자리가 아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다시 알게 되는 자리다.